윤덕원(‘브로콜리 너마저’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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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30대 후반이 되었다.
청춘을 대변하는 밴드 비슷한 느낌으로 꽤 오래 활동했던 것 같은데, 사실 ‘나는 이미 기성세대잖아?’ 하고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이 지면을 통해 고백한다.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되짚어 보았는데 사실 명확한 시점은 없었던 것 같다. 30대 중반이 되면서?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직업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좀더 자리를 잡아가면서? 아니면 내가 그렇게 느끼기에? 확실한 것은 어떤 것도 명확한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저 여러 가지 조건이 결합하여 ‘어느 정도 그럴듯한’ 수준에서 어떤 세대에 편입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문득 나도 모르게 쓰고 있는 단어에서 의아함을 느낀다. 편입‘하는’ 것이 아니라 편입‘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를 어떤 세대로 결정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이유로 내가 특정한 세대에 속해 있다 느끼는가? 어떤 기준도 완벽하게 적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주체들이 ‘세대’를 규정하려 한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뒤에 숨어 있는 욕망과 의도가 있다. 전상진 교수의 『세대 게임』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꼼꼼하고 치밀하게 정리해나간다.
서구에서 제기되었던 세대 갈등의 양상을 살펴보면 그 대립 구도가 비교적 명확히 드러난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노령층 인구가 증가하면서 투표권을 장악하게 된 노년층이 복지정책 등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겨난 ‘세대 갈등’의 양상은 노년 빈곤율이 세계 1위라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현대 한국의 빈부의 격차는 연령보다 계급의 격차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전상진 교수는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명확히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세대갈등론은 지금 이 사회를 잘 이해하고 판단하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는 방법론이다.
또한 세대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도 자의적인 기준이 작동할 여지가 너무 많다. 대표적인 것이 ‘기성세대’라는 표현인데, 30대부터 그 이후의 어떤 연령대도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기성세대일 수 있다. 비슷한 예로 ‘청년’의 정의가 10대부터 최대 40대까지 사용되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최근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국가 지원사업 대상으로서의 청년은 대체로 만 39세까지인 것 같고, 일부 정당의 청년할당제는 40대 중반까지를 대상으로 하기도 한다. 이처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세대 구분 기준에도 불구하고 세대론은 그 영향력을 높여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절로 의문을 가질 만하다.
국정 농단과 박 대통령 탄핵을 놓고 광화문 광장에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시기에, 시청 앞에서는 태극기를 앞세운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책에서는 ‘맞불 집회’로 표현.) 대체로 고령으로 태극기와 성조기, 유신 시대의 가치를 옹호하고 복고를 주장하는 그들의 모습은 광화문의 민주화 열기와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만약 두 집단의 갈등이 일종의 세대 갈등처럼 느껴졌다면 그것은 그들의 평균적인 연령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광화문에 모인 이 중에서 자신도 나이가 많지만 시청 앞에 모인 맞불 집회에 대해서 같은 세대로써 부끄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몇몇 젊은이들은 맞불 집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비합리적인’ 구분을 일견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유로 전상진 교수는 ‘시간의 고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아주 대략적으로 정리하자면 특정한 시간과 경험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같은 세대’로 인식하게 되는 심정적 배경을 나타내는 말인데, 우리가 어떤 시간과 경험을 익숙하고 편한 것으로, 때로는 옳은 것으로 느끼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용어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시간의 고향’은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함과 향수를 느끼게 하지만 비교적 합리적이지 않은(때로는 명확히 잘못된) 판단을 하더라도 곱씹어 생각하고 반성할 기회를 빼앗아갈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경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특히 다양한 논쟁적 사안에서 세대를 기반으로 한 프레임을 짜 여론을 호도하고 이익을 취하려는 세력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수많은 정치 평론가들이 세대론을 들고 나와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어필한다. 의미 있는 분석도 있겠지만 어느 곳보다 편파적인 주장이 그럴싸하게 담기기 좋은 주제다. 그럴수록 공정성을 상실한 프레임 짜기에서 벗어나 더 발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사회 전반적인 의식 수준을 함께 높여가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전상진 교수의 『세대 게임』은 그럴듯한 오류를 따라가 그 논의의 배경과 한계를 되짚어보는 번거로운 수고를 자진하고 있다. 저지르기는 쉬워도 수습하기는 어려운 말들의 세계에서 이성과 근거로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있다는 것은(비록 그것이 반박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존재하지만) 우리가 좀더 나은 경지로 도달 가능한 발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