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 스펙트럼 시리즈 리뷰 연재] 소설이 가장 잘하는 일(소설가 김봉곤)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유숙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8)

 

소설이 가장 잘하는 일
―오에 겐자부로의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김봉곤(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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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또래의 친구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기억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다. 반공 교육/정신이 격렬했던 시대에 성장한 것도 아니요, 남해 바다가 보이는 반도의 최남단에서 자랐음에도 어째서 어린 시절의 나는 전쟁 공포에 그토록 자주 시달렸던 것일까? 그뿐만 아니라 전쟁은 ‘고아’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옮아가고, 엄마가 나를 버리는 것 혹은 엄마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무섬증은 내게 가장 오래되고도 잦았던 상상이기도 하다. 유년기에 보았던 「엄마 없는 하늘 아래」 「플란다스의 개」, 전래동화 속에서 부모님을 ‘여읜’다는 표현을 발견했을 때, 나는 주인공들의 꿋꿋함이나 어엿함을 배우기보다 전에 없는 격렬하고도 절망적인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그럴 때면 안방으로 달려가 문을 열면 보이는 엄마의 모습, 포화 속이 아닌 안온한 거실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감정은 공포의 모습으로 다가왔지만, ‘슬픔’이나 ‘죽음’의 다른 얼굴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는 그러니까 내 공포의 효시라고도 볼 수 있을 ‘전쟁’과 ‘고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우리가 손에 땀을 쥐며 보아온 일본 추리소설/만화처럼 밀실이 되어버린 한 마을의 이야기다(밀실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이란 점에서 『소년탐정 김전일』을, 극한의 상황에서 피어나는 에로스란 점에서 타가메 겐고로의 만화를 떠올려도 좋겠다!). 줄거리는 이렇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가족에게까지 버림받은 감화원의 소년들이 산골 마을로 투입되어 비참한 노역 생활을 하게 되고, 졸지에 그곳에 전염병까지 돌아 하나둘 사람이 죽어나간다. 어른들은 매번 학대에 가까운 처분을 내리는 것은 물론 나중에는 소년들을 마을에 감금한 채 떠나버리기까지 한다.
이처럼 심플하게도 정리될 이 소설이 미칠 듯한 매력을 선사하는 이유는 과감과 섬세가 한데 섞여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묘사에서 온다. 아름다움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발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과 풍경 속에서도, 폐허에 가까운 마을과 육신 속에서도 꿈틀거리며 육박해오는 육감과 미감. 터무니없는 순간에 솟아오르는 선정과 어처구니없는 형편에서 피어나는 서정. 그러한 오에 겐자부로의 문장 속 무람없음과 무엄은 때때로 당혹감을 수반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작가가 철저히 십대 소년이 되어 서술하고 말하기에, 검열되지 않고 낭만화하지 않은 날것인 소년 그대로이기에 우리가 느끼는 것이기도 하리라.
무엇보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는 제목처럼 소설 내내 맴도는 죽음의 냄새, 짙은 폭력의 징후에도 불구하고 ‘뽑히기 전’의, ‘쏘이기 전’의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이미지로 가득하다. 나아가 기꺼이 뽑히겠다는 용기, 기꺼이 쏘이겠다는 용맹함은 그들의 삶이 오욕과 오물의 진창이 아니라 마을에 내려앉은 숫눈의 표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것임을 끝내 역설한다. 소년들이 소년일 수 있는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눈감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순정한 분노, 절망, 기쁨, 무한한 기대와 환대가 가능하다는 것까지.
때때로 죽음의 순간이 강렬하게 환기될 때,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내게 유일하게 위안이 된 것은 “나는 없었었다”라는 문장이었다. 나는 없었었음을 견뎠듯 앞으로의 없음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나는 이내 우리 모두에게는 감염의 순간이 있었고, 그러므로 나는 태어났고, 그렇다면 그건 또 축제라고도 생각해본다. 감염은 전염병에도 해당하는 말이지만 미소에도 더없이 잘 어울리는 단어이지 않은가. 무릅써 다르게 보기. 어쩌면 그건 소설이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하지 않은가. 진창 위 폐허에 내려앉은 흰 눈, 그곳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꿩의 찬란한 색깔은 소년들이 감동한 풍경에, 우리가 함께 볼 세상에, 무릅써 펼쳐 보이는 소설에 다름 아닐 것이다.
소설 속 ‘나’와 ‘리’의 대화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게 축제의 노래야?”
“아니야, 장례식 노래야.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배운 거야.”
“축제의 노래지, 뭐든지 축제의 노래지.” (1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