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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란(「공동정범」 「두 개의 문」 감독)
2004년, 처음 다큐멘터리를 시작했다. 정말 막막했다. 의지할 데 없이 외롭고 답답한 마음을 일컫는 말인 ‘막막하다’라는 뜻 그대로, 모든 것이 막막했다. 그저 카메라를 온/오프하는 것만 알고 있었던 나는 촬영한 영상들이 어떻게 ‘다큐멘터리’가 되는지 몰랐다. 그것은 소음이 음악이 되고, 흙이 도자기가 되거나 아니면 시간이 역사가 되는 것만큼 완전한 질적 변화다. 이 변화는 ‘편집’을 통해서 이뤄진다. 이 분명한 사실을, 아이쿠, 첫 작품이 끝날 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2004년도만 하더라도, 촬영할 때 6밀리 테이프를 사용했다. 어느 정도 촬영이 마무리되었다고 느꼈을 때, 테이프가 100개가 넘었다.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까운 선배에게 그다음 과정에 대해서 물었더니, 선배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촬영된 테이프를 컴퓨터에 파일로 변환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캡처’라고 했다. 이렇게 캡처 받은 영상들을 ‘타임라인’이라는 곳에 ‘드래그’를 해서 자르고, 붙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처음 타임라인을 마주했을 때가 기억난다. 너무 신기했다. 영화가 시간의 예술이라더니, 이것을 타임라인이라 부르는구나, 싶었다. 선배는 타임라인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려고 애썼다. “여기 이것이 시간 표시야. 여기에 시간의 순서대로 촬영본을 올려놓으면 돼.”
“시간의 순서대로 놓으면 돼요?”
그때 나는 ‘시간의 순서대로’라는 말을 ‘촬영한 순서대로’라고 이해했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사건의 순서대로 하면 돼.”
사건의 순서? 사건의 순서와 촬영한 순서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 선배는 침착하게 다시 설명해주었다.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잖아. 그것을 하면 돼.” 이럴 수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민망한 고백을 하자면, 이 대화를 하고 있을 당시 나는 영화이론 석사논문을 쓴 직후였다. 일단 그냥 해보라는 말을 남긴 채 선배는 돌아갔다.
친절하고 인내심 강한 선배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배의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편집의 원리, 즉 이미지(와 사운드)가 내러티브가 되는 과정이었고, 또한 플롯과 스토리의 차이였다. 이것저것 시도해보면서, 아주 조금씩 편집의 원리를 깨달아가며 내러티브를 만들었다. 그런데 편집하는 것에 급급하여, 내가 만들고 있었던 것은 다큐멘터리 영화이기에, 내러티브를 구성할 때 매우 무거운 윤리를 지닌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나이 든 주인공이 젊은 날 얼마나 매력적인 여성이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젊은 시절 사진을 사용했다. 첫번째 모니터링을 하던 날, 또 다른 선배는 이 지점에 대해서 따끔한 지적을 했다. 나이 든 여성의 삶을 다룰 때, 그녀의 젊은 날 사진은 자칫 현재를 초라하게 만드는 장치가 될 수 있으니 주의 깊게 사용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내러티브와 윤리의 상관성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아주 조금씩 무척 작은 것들부터 나름 큰 것에 이르기까지 16년째 다큐멘터리 영화를 깨닫고 있다.
다큐멘터리 전문 웹진 『DOCKING』에서 김옥영 선생님의 연재를 보았을 때, 내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아주 조금씩, 그것도 모호하게 깨달았던 나의 경험들이 선명하고 또렷하며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되어가는 것을 보았다. 매우 신기하면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매번 연재 글이 올라올 때마다, ‘아, 이렇게 정리될 수 있었구나’를 반복했다. ‘편집―이야기의 육체 만들기’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는 편집에 대해서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 연재 글이 책 『다큐의 기술』로 정리되었다. 너무나 기쁜 일이다. 우리의 막막함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다큐의 기술』로 인해서 적어도 그 막막함은 설명 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은 훨씬 덜 두려워할 것이다. 지금 다큐멘터리를 시작하고 싶다면, 가장 가까운 곁에, 언제든 펼쳐 볼 수 있는 곳에 『다큐의 기술』을 놓아야 한다. 아이들이 보통 어둠 속에서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거나 손뼉을 치는 것처럼, 『다큐의 기술』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노래이거나 손뼉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