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리뷰] 바오밥나무와 방랑자, ‘상상력 호텔’에 머무르라

 

 

 

 

 

 

 

 

 

 
 

 

 

 

 

 

 

 

황주리(화가)

몇 년 전 아프리카 여행길에서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나무를 만났다. 황혼 녘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바오밥나무들은 언젠가 가본 미얀마의 불상들 같기도, 자연이 만들어낸 거대한 전신주들 같기도 했다.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둠 속 바오밥나무들이 어린 시절에 말로만 듣던 망태 할아버지처럼 무서워질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민병일의 동화 『바오밥나무와 방랑자』를 읽으며 그때 그 바오밥나무들이 생각났다.
그곳에서 『어린 왕자』를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42년 뉴욕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생텍쥐페리는 냅킨에 장난삼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동석했던 출판업자가 무슨 그림이냐고 묻자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한 아이라고 답했다. 출판업자는 이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동화로 쓰면 어떨까 제안했다. 생텍쥐페리가 냅킨에 그린 낙서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우리 모두의 영원한 동화 『어린 왕자』가 시작되었다.
생텍쥐페리 자신이기도 한 『어린 왕자』의 화자 ‘나’는 화가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 비행기를 몰던 중 엔진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한다. 이때 어린 왕자가 나타나 양 한 마리를 그려달라고 조른다. ‘나’는 그 부탁을 들어주면서 어린 왕자가 사는 소행성 B612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던, 가끔 심술을 부리던 자신의 장미꽃이 지구별에는 한 송이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걸 알고 어린 왕자는 슬퍼한다. 하지만 그 많은 장미꽃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장미꽃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도 알게 된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길을 들이고 관계를 맺으면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꼭 필요한 존재로 화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어린 왕자는 자신만의 특별한 존재인 장미꽃을 떠올리며 떠나온 별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인간의 삶과 사랑과 고독에 관한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슬픔을 그린 『어린 왕자』는 나이가 들어 읽으면 또 다른 맛이 난다. 어린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동화이며 어른을 위한 영원한 동화이기도 한 『어린 왕자』만큼 영원히 읽히는 책이 또 있을까?
『어린 왕자』를 읽을 때처럼, 민병일의 동화 『바오밥나무와 방랑자』 이야기들에 끌려들어가듯 읽으며 그 역시 화가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가 아닌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라는 이야기 안에 영원히 잊히지 않을 그림을 그려 넣었듯이, 민병일 역시 샤갈과 루소와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그림을 합쳐 민병일식 그림들을 그려 넣었다. 그림들을 바라보다가 이야기를 읽으면 ‘유리병 속의 꿈을 꾸는 방랑자’ ‘순간 수집가’ ‘그림자를 찍는 사진사’ ‘6억 년 전의 기억을 간직한 달팽이’ ‘나미브사막에서 온 물구나무딱정벌레’ ‘슈테른샨체 벼룩시장에서 열정을 파는 히피’ ‘기적을 파는 가게’ ‘불완전함을 가르치는 에른스트 감펠 씨의 나무 그릇’ ‘히말라야 부탄왕국에서 온 파란 양귀비꽃’ ‘잠자는 집시’ ‘나무 마법사 숨숨’ ‘별로 간 자벌레’ 등 시적인 이름을 지닌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 작가는 동화를 통해 “인생은 영원한 미완성의 실험 작품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 실험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설렘이라는 원동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설렘의 다른 이름인 열정을 잃어버린 이에게, 열정을 도둑맞은 이에게, 열정이 식어버린 이에게 보내는 선물이다.
외로움에 관한 사색도 인상적이다. 외롭다 느낄 땐 가만히 기다려보라고. 외로움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라고. 외로움과 싸우지 말고 그것이 지나가기를 가만히 기다려보라고. 모든 것이 오래 머물지 않듯, 외로움도 한순간 머물다 가는 바람 같은 것이라고. 민병일의 이메일 아이디는 ‘병일소년’이다. ‘병일소년’이 아니면 쓸 수 없을 것 같은 이 책을 읽으며 문득 그와 나의 공통점이 떠올랐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마음속에 ‘어린 왕자’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과, 오래도록 외로움을 단련한 외로움의 연금술사라는 자부심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라고 해두자. 별에 관한 그의 시적인 묘사는 그가 얼마나 오래도록 별을 관찰했는지 보여준다.
“사람들이 별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들이 별에서 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별들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별을 떠나며 별의 언어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별들이 환생하여 사람으로 사는 곳이다.” 이 책은 별을 사랑하는 족속들에 관한 이야기다.
2005년, 내가 개인전을 열고 있던 전시장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것 같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가 쓴 산문집 『창에는 황야의 이리가 산다』라는 벽돌만 한 두께의 책 한 권을 받았다. 제7회 전숙희문학상 수상작(2017)이기도 한 그 책을 펴니 그의 글씨가 눈에 띄었다. 손 글씨를 그렇게 아름답게 쓰는 사람은 참 드물게 보았다.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이고 그 안에 서린 성의가 보인다. ‘병일소년,’ 그는 글씨 하나에도 성의가 가득한 희토류 인간이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아름다운 글들을 써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상상력 호텔, 그의 동화 속에 한참 머무르라. 아마도 책값 외엔 호텔비도 무료이며, 두고두고 그리운 사람을 불러내는 꿈을 꾸리라.

민병일 지음
카테고리 문지푸른책 | 출간일 2020년 7월 30일
사양 변형판 126x204 · 231쪽 | 가격 16,000원 | ISBN 9788932037509

민병일

서울 경복궁 옆 체부동에서 태어나 서촌에서 자랐다. 독일의 로텐부르크 괴테 인스티투트를 거쳐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 시각예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다. 홍익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대중예술론과 미디어아트 등을 강의했으며, 동덕여대에서 겸임교수로 현대미술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