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로 배우는 글읽기』(제3판)
(최시한 지음, 문학과지성사, 2016)
김혜정(소설가, 경기 부명고등학교 교사)
많은 아이들이 스스로 책을 읽지 않는 세대라고 자조하고 있다. 기성세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책 읽지 않는 풍조를 한탄한다. 하물며 교사들마저도 ‘요즘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는 말은 한낱 외계인의 잔소리에 불과하다. 생기부에 기재 운운하면 반응이 180도 달라진다. 그러니 책을 읽고 독후감을 작성하는 것을 입시의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푸념한다. 그러면서 읽지 않는 것이 모두의 공통점이다.
이런 가운데 수능이 다가오고 수시원서 접수 기간이 다가왔다. 입시를 둘러싸고 그야말로 자기소개서 대란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이야기를 쓰느냐가 이 시기만큼 절박한 때도 없을 것이다.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읽기를 외면해온 아이들이 자기의 스토리를 만들어 쓰는 걸 제대로 하기란 쉽지 않다. 자기의 스토리 하나를 만들어 쓰는 데 곤란증을 겪는다. 호흡곤란 수준이다. 잘 쓰고 싶은데 잘 쓸 수가 없다. 읽지 않고 쓸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만 이미 늦었다. 아이들도 학부모도 교사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누가 아이들로 하여금 자조하게 만들었는가. 자기 스토리 하나를 적는 데 곤란증을 느끼게 만들었는가. 어른들로 하여금 이러한 상황과 풍조를 한탄하게 만들었는가. 어디에선가는 읽기와 동떨어진 입시정책을 고집하고, 누군가는 책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부와 권력을 누리는 삶을 몸소 보여주며, 심지어 그런 삶을 부추기고 있다. 교사들 또한 그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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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그 책임을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환경 탓으로 미룰 수는 없다. 지금이라도 읽기의 복원에 나서야 한다. 읽기의 방법을 진지하게 제시해야 할 때다. 제아무리 책을 손에서 놓게 만드는 스마트폰과 컴퓨터마저도 읽기의 장으로 소환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 과업을 어떻게 시도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제대로 읽게 만드는 일에 동참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읽기를 제대로 세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이 고민을 덜어주고, 읽는 주체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 있다. 바로 『수필로 배우는 글 읽기』이다.
이 책은 경수필에서 중수필에 이르기까지 읽기의 실제와 이론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매력적이다. 다양한 수필을 단계적,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전략적으로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독자를 초대하는 식이다. 그래서 여행지가 낯설지 않고, 같은 여행지라고 해도 전혀 다른 곳인 양 새롭다. 길목마다 표지판이 분명하고 인도하는 목소리가 은근하여 책을 읽는 과정이 명석하고 다정한 벗과 함께 하는 여행과도 같다. 텍스트의 분석은 정교하고 텍스트의 내용은 마음을 사로잡는다. 「글, 읽기, 읽는 힘」 편에서 「설해목」을 만나고 「필자의 상황과 관점」 편에서 「시골 한약국」을, 「제재와 주제」 편에서 「권태」를 읽는 즐거움은 이 책을 읽기 전과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머리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따라 움직인다. 뜨거운 공감도 몸의 작용의 일부라면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이 글을 쓰는 이유이다. 저자의 소설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의 ‘왜냐 선생’(고전소설 『허생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지식인의 역할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이끌어내는 인물)’이 그랬듯이 이 책 또한 줄곧 왜냐, 고 묻는다. 스스로 묻게 만든다. 머리에 이어 몸이 분주해지는 지점이다. 읽게 하고 마침내는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도록 추동한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시종일관 강조하고 추구해온 관점에서 끝내는 ‘자유로운 책읽기’를 통해 열어두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귀한 덕목이다. 독자는 ‘책에 대한 엄숙주의와 모범주의로부터의 해방되어 책읽기의 자유로움을 추구할 수 있기 위해서도 많이 읽고 잘 읽어야 하며, 원리와 방법의 체계화는 피할 수 없다’는 답을 얻는 데 마침내 도달하게 된다.
길은 길잡이에 따라 험할 수도 있고 평탄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범상치 않은 길잡이를 만난 행운을 실컷 누리고 있다. 에돌아갈 길을 지름길로 갈 수 있게, 길을 잃을 뻔한 위기에서, 어쩌면 위기를 위기인 줄도 몰랐을 뻔한 미욱함까지 깨닫게 하는, 그리하여 길을 찾도록 이끌어주는 길잡이를 만나는 행운은 아무나 누리는 것은 아니리라.
‘필자와 독자, 말과 사물, 사물과 필자 등등의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기보다 그들 모두가 뜨겁게 만나는 공간 그 자체가 글이다.’ 그리하여 글이란 ‘단지 의사소통의 매개물이라기보다 드넓은 광장이라고 해야 옳다’(32쪽)고 한 저자의 견해에 깊이 공감한다.
이제 책을 읽지 않는 우리 모두가 아이들과 함께 그 ‘드넓은 광장’으로 나갈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