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리뷰] 그래도 같이 살아가는 이유

06_방주로오세요(푸른책)

 

글_한정은(독자)

#1. 더러운 세상에 산다는 것 
요즘 들어 아이가 부쩍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이 더럽다는 기준과 근거는 무엇일까. 아이는 무엇을 보았길래 툭하면 무슨 유행어처럼 말끝마다 같은 말을 내뱉는 걸까 싶어 하루는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아이는 한숨을 쉬고선 이렇게 답했다.

“빽이 없으면 내가 처한 상황이 불리해지는 거.”

간결하고 단호했다. 빽이 없어서 어떤 피해를 당한 적이 있는 건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 아이는 ‘빽’이 흔히들 생각하는 부모님의 직업이나 재산, 아파트 평수 같은 것이 믹스된 배경이 아니라 한마디로 ‘일진’이라고 부연했다. 반에서 일진과 연결고리가 없으면 ‘찍히기’가 쉽다는 뜻이었다. 날라리로 보이는 아이들은 반드시 중학교 일진을 빽으로 두고 반에서 짱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중학교 일진이 초등학교 후배를 선별해 기르면서 중간 관리자를 만들고, 초등학교 짱은 왕따를 중학교 일진에 보고하고 중학교 일진은 타겟이 되는 아이들만 골라 돈을 뜯거나 괴롭힌다. 초등학교 짱과 중학교 일진이 어떤 경로로 연결이 되는지는 아이들도 모른다고 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아파트 단지를 사이에 두고 근처에 있으면 이 고리는 더욱 질기고 탄탄한 모양이다. 그래서 반에서 ‘빽’이 있는 친구들과 표면적으로 사이좋게 지내야 하며 혹시라도 그들에게 찍히면 학교생활이 곧 죽음이니 ‘더러운 세상’이라는 것이다. 아이는 이번에 전교 짱과 같은 반이 되었는데 다른 반에선 그 짱과 같은 반이라는 소식에 울었다는 아이도 있다고 한다. 내가 직접 귀로 들으면서도 믿기가 어려웠고 부모된 입장에서도 딱히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 전에 미용실에 갔는데 거기서도 일진이 단골화제였다. 한 아이가 일진에 맞고 돌아왔는데 피해자 아버지가 유명한 교수였다고 한다. 교수 아버지는 다른 학부모를 선동해 가해자 아이를 ‘처단’하자고 의견을 개진했고 다른 학부모들은 적극찬성을 표했다. 그런데 이 처단 이라는 것은 법적인 처벌이 아니라 아이의 앞길을 두고두고 막겠다는, 일종의 보복성 처벌이었고, 학부모들은 이에 동의, 협조를 한 것이었다. 속된 말로 내 자식 때린 그 자식이 어디 사람구실하게 내버려두나 보자, 하는 식이다. 그럴 만한 사회적 지위와 인맥과 돈이 있기 때문에 앞에선 선처를 바라네 합의를 해주네 하면서 뒤에선 모든 연줄을 동원해 끝까지 밟아주겠다는 것이다
아이 말로는 사후 보복 때문에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쉽게 이르지도 못한다고 했다. 아무리 일진을 처벌하고 전학을 가게 해도 우리가 아이 학교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은 학교 내에서 발생하는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견뎌야 한다. 세세한 부분에서 미묘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아이들 몫의 학교생활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빽이 있는 부모들도 피해자가 된 자기 아이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수 없는 이유이다. 아이와 집중적으로 이야길 해보니까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현재로선 가장 최선이라는 결론이었다. 너무 잘난 척을 해도 안 되고 너무 침묵해도 안 되고 혼자 얌체 짓을 해도 안 되고 안 좋은 일 있다고 징징대도 안 되고 어떤 특정 과목을(특히 예체능) 너무 못해도 안 되고 너무 더러워도 안 되고 너무 뚱뚱하거나 못생겨도 안 된다. 한마디로 모든 것의 중간치인 평범한 아이가 되는 것이 찍히지 않는 비결인 것이다. 가슴 아픈 것은 혹시 학원을 안다니거나 학습지를 안 한다거나(전교 1등도 아니면서) 핸드폰이 (혹은 MP3가) 없다거나 집이 멀다거나하는 사항도 찍히는 사유가 된다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뿌리 깊은 획일성의 잔재가 아닐 수 없다. 다수의 입장에서 소수를 인정하지 않는 전형적인 집단 이기심이다. 더 많은 쪽이 강한 것이고 다르고 적은 쪽이 약한 것이다. 아이들이 못 참는 건 자신과 달라서 아예 1등을 하거나 재능이 뛰어나 가수나 특기생이면 모를까 자신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으면서 달라 보이는 그 모든 것인 듯하다. 따라갈 수 없는 차이만 할 수 없이 인정하고 제끼는 것.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가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닌 듯하다. 일진이라는 상징은 학교폭력 조직을 의미하지만 그 이면엔 재수 없(어 보이)는 또래에 대한 응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재수 없어 보인다는 건 아주 많이 다르거나 우월한 것이 아니고 작고 사소한 차이에서 비롯된 불쾌감은 아닐까. 그 불쾌감은 혹시 살려면 같이 살고 죽으려면 다 같이 죽어야 한다는 식의 발상은 탈개인, 탈개성의 시대로부터 온 집단 트라우마의 잔재는 아닐까.

아이들은 우리 때 보다 전반적으로 열등감, 패배감은 덜해졌지만 시기심은 많아졌다. 물질적으로 풍부해졌기 때문에 괜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주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시기심은 결국 그 부모들로부터 기인한다고 보기에 결국 아이들은 우리가 배우고 키워온 악의 습관들을 그대로 상속받아 시대적 환경과 함께 급진적으로 변형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제발 우리 아이들이 우리와는 다른 교육을 받고 우리와는 다른 깨끗한 세상에서 살아가길 바랐지만 아이들은 우리의 가치관을 몸과 마음에 그대로 새긴 채 똑같이 아니 어쩌면 더, 더러운 세상이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저 씁쓸하고 속상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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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깨끗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  
39.5㎢는 강남구의 면적이다. 우연인가. 이 책에서 만난 방주시의 면적은 꼭 39.5㎢이다. 그러니까 강남구만큼의 땅에 높이 1.2km 되는 뚜껑을 하나 덮어 서울특별시 중에서도 진짜 특별한 그들만의 도시를 만들었다면 그 도시 이름은 ‘방주’라는 것이 작가의 설정이다.

이 소설은 방주시에 탑승한 아이들과 방주시에서 하선한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탑승과 하선이라 한 이유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오기 때문이다.) 아니, 탑승과 하선을 한 아이들은 같은 아이들이므로 방주시에 탑승했다가 추방된 아이들로 바꾸겠다. 한데 이 소설이 꼭 강남구에 이사 갔다가 적응 못하고 다시 살던 변두리로 돌아온 어느 꿈 많은 서민의 이야기로 읽히는 건 무슨 까닭일까. 유리천장이라는 말이 있듯이 실제 뚜껑만 덮지 않았지 방주시라는 가상의 도시는 청와대와 국회의사당, 삼성 밑 지하 백 미터 위치쯤에 존재할 것 같은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내재한 채, 작가는 어떠한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닥쳐도 안전하며 이상기후와 질병에 노출이 안 되는 ‘이상향’이 있다 하면 그건 누가 왜 만들었는지 우리에게 보고하고 있다. 아니 차분히 따져 묻고 있다.

이 소설은 장기 프로젝트로 실현한 ‘이상향’이 만들어지면서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지름이 15㎡나 되는 운석이 떨어지고, 그 자리에 생긴 넓이 39.5㎢, 높이 1.2㎞ 되는 ‘방주시’가 만들어진다. 돔 형태의 초호화 도시인 이곳은 저 밑의 지상인과는 차원이 다른 양식 있고 세련된 부자들만의 세상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있는 방주고등학교에는 주로 국회의원, 판 검사, 변호사, 의사 같은 상위 레벨의 부모의 자제들이 다니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방주시가 탄생했고 그곳엔 최상위층의 인간들만 살게 되었을까. 소설 속 설명에 따르면, 정부에서 운석이 떨어지고 난 후 그 자리를 복원할 생각으로 소수정예의 공간으로 계획 개발된 것이다.
영화 「2012」(2009)에서 저명한 과학자들이 예언한 멸망의 2012년을 대비해 정부가 비밀리에 추진한 일들이 꼭 이 소설과 흡사하다. 「2012」에서는 전 세계 곳곳에서 지진, 화산폭발, 해일 등의 각종 재해들이 발생하고 있을 때 G8 회원국은 ‘노아의 방주’같은 거대한 배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방주에 탑승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어마어마한 금액(약 10억 유로, 약 1조 5천 억 원)을 낸 지구상의 몇 십만 명뿐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돈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앉아서 쓰나미에 실려 가거나 화산과 동반 폭발하면 된다.
실제로 미국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인 휴스턴에서는 허리케인을 막기 위해 도시전체를 돔시티로 계획한 적아 있다. 사실 도시를 덮고 보호하는 거대 인공 돔은 오랫동안 SF의 소재였으며 실현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 대중적인 편의장치로 사용하는 네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이기들도 불과 십 년 전에는 미래프로젝트였다. 도시 계획은 막대한 예산과 시간, 기술이 걸리는 사안인데 문제는 샘플형의 이 도시에 과연 누가 혜택을 받을 것인가 인 것이다.
네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도 돈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듯이 미래 도시도 혹시 일부 특권층만을 위한 계획이 되지는 않을까. 대학에도 정원이 있듯이 방주시에도 정원이 있다면 선택을 받기 위해 사람들은 경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사람을 솎아내기 위한 ‘서바이벌 게임’의 승자는 누가 될까. 소수의 특권층도 학교는 다니고 병원도 가야  하고 식당도 가야하는데 혹시 방주시에는 그 특권층을 위한 봉사자들(이를테면 ‘도시의 시스템을 유지시켜줄 따까리’ 같은)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기후가 변동하고 질병이 창궐하고 물자가 부족한 비-방주시민들은 과연 이 불평등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말도 안 되는 불평등을 타파하기 보다는 혹시 악착같이 방주시에 탑승하려 사력을 다하진 않을까. 내가 안 된다면 내 자식이라도 올려 보내고 싶지 않을까.

#3. 그것만이 우리 세상
이 소설은 비록 소재와 구성은 SF 영화의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갈등과 해결 방식은 지금 우리 현실과 똑같다. 그래서 서사는 전혀 미래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시사 문제로 읽힌다. 작가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모두 지금 당면한 문제이다. 우리는 모두 불평등하고 불공정한지 알고 있지만 어떻게든 더 살기 좋은 공간을 원하고 더 수준 높은 학교를 원하고 질병과 재해 없이 오래 살길 원하고 더불어 내 주변 사람들도 같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방주시내의 방주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빌어 작금의 문제들을 인큐베이팅하는 데 성공했다.

방주고는 성경을 일독해야 하는 일종의 종교 학교이면서 대기업 계열사 모 정보통신 회사의 회장이 이사장인 사립학교이다. 이사장의 손자가 학생회장이니 삼대 권력세습의 북한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 학생회장 나일락은 삼성가의 후계자쯤으로 보면 되겠다.
소설의 주된 인물들은 이 학교에서 선심 쓰듯 정원의 10%를 할당해 입학을 허용한 ‘지상의 아이들’이이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인물 이마‘노’와 이루‘비’는 1%의 특권층 밑에서 잘 배운 인재들로 상징되는 하수대리인, 즉 그들만의 노예로 상징된다. 학생회장 나일락은 삼성가의 후계자쯤으로 보면 되겠다. 방주시에 불만을 가진 독서모임 프로네시스의 회장이면서 기숙사장 시온施昷은 가정형편은 형편없지만 성적은 최상위인 소위 노조위원장이나 운동권 학생회장쯤으로 보면 되겠다. 윤시온은 학교를 폭파하겠다는 테러계획의 음모를 주도하고 실행하는 요원이며 학교방침을 거스르는 불가촉천민을 잡아내겠다는 일락은 권력자의 대리인으로 보인다. 아이들 이름이 마노와 루비를 비롯해 유시온, 나일락, 유다나, 남달리, 배두인, 노안지, 박하상인 것이 굉장히 종교스러우면서도 중성적이고 뜻깊어 보인다.

이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하여 현실성을 확보한 인물은 주인공 마노이다. 마노는 ‘너무 잘나지도 않고 못나지도 않은 중간 인물’이었기에 평범성을 주목받아 학생회 전용 프락치로 선택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위해 마노의 쌍둥이 누나 루비를 이용한다. 이제 마노는 쌍둥이 누나 루비를 지키기 위해, 방주고에 다니는 ‘광장 첫사랑’을 지키기 위해 ‘프락치’가 되어 시온 조직의 계획을 막으려 한다. 가족의 안전 때문에 직업을 택하고 사랑 때문에 조직을 배반하는 전형적인 드라마 캐릭터이다.
작가는 마노의 고민과 질문, 대답을 통해 마노의 선택에 동의하는지 반대하는지 의견을 여러 번 묻는다. ‘자기가 믿는 것,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것’이 정의라고 믿는 마노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지 절간을 부수는 게 아니’라고 결론내릴 때 당신도 그렇지 않냐고 깊게 응시한다. 우리는 뿌리 깊은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이 사회의 학벌체계와 교육시스템을 늘 비판하지만 노력해서 얻은 학벌을 자랑스러워하며 운 좋게 들어간 대기업에 만족해한다. 혹시 부모를 억세게 잘 만난 것은 물론이요 학벌도 좋고 연봉도 좋고 결혼까지 재력의 집안과 맺어져 강남의 어느 최첨단 아파트의 최상층에 살고 있다면 저 밑에 사는 인간들은 땅바닥인간이거나 쓰레기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를 일이다.

선택받은 이들과 그들이 또다시 선택한 하위자들은 방주인지 바벨탑인지 모를 곳에서 신과 가까운 높이에 안도하며 살아갈 것이고, 지상에 남아 있는 자들은 개미지옥에 빠진 벌레들처럼 꼬물거리며 살아가리라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위에 있는 이들의 먹이나 거름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p110

방주고의 학생들은 ‘미디어의 의무와 표현의 한계’ 같은 주제를 영어로 프리토킹하면서 수업을 받고 매끼 7성급 호텔 같은 식사를 하고 트레이닝복도 프랑스 의상학과 출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는다. 그래서 지상에 가족을 두고 온 의식 있는 학생들은 내 가족이 기후나 돌연변이, 물자부족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상대적 불평등’ 때문에 살아갈 수 없는 것이구나를 실감한다. 그중에 기특하게도 이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빨리 깨달은 시온은 이렇게 말한다.

못 따라 가는 거 맞지. 머리가 아니라 이, 마음이.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사람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도저히 접지 못하는 마음이.   -p158

이것이 책 좀 읽고 글 좀 쓰고 연설 좀 하는 열일곱의 엘리트 학생의 입에서 아니 가슴에서 나온 말이다. 어른들처럼 자기가 구축한 세상에 이민족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권력과 돈을 이용해 치밀한 각본을 짜고 그 시나리오에 연루된 무고한 조연들이 시니컬하게 같은 친구에게 충고를 한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너는 외려 다수의 하나가 되고 너한테 아무리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해도 그땐 당연히 소수를 배제했을지 모른다고. 그러니 여기 어렵게 다수가 된 우리들이 소수인 너희들을 봐주기는 힘들다고. 우리가 사는 깨끗한 세상엔 더러운 소수는 필요 없다고. 어쩌면 이리도 일진의 논리와 같은 것인가.
소설은 대단한 흡입력을 가지고 끝까지 쉴 틈을 주지 않으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그리고 미래의 또 다른 반전을 암시하면서 막을 내린다. 장편이긴 하나 짧고 굵은 이야기로 느껴졌고 작가의 개성과 성찰이 잘 어우러졌다. 청소년용으로도 무리 없고 우리 같은 학부모 혹은 교사들에게도 적극 추천이다. 결론이 없기 때문에 토론용으로도 좋을 듯하다. 작가의 전작들을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 작품을 읽고 『아가미』나 『고의는 아니지만』이 궁금해졌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는 구병모라는 작가가 남자인줄 알았다는 T_T)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책도 쓰고 영화도 만들고 음악도 그림도 그리는 건 아닐까 싶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작품을 느끼다 보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싶기 때문에. 아이가 내뱉는 ‘더러운 세상’도 방주시라는 ‘깨끗한 세상’도 결국은 우리 사는 세상의 양면인 것이지 서로 다른 세상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더럽기 때문에 깨끗한 세상을 원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더러워질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살아가는 동안 그 더러움과 깨끗함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을 것 같다. 다만 지금 더럽다면 하루속히 깨끗해지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조금 깨끗해졌다면 다시 더러워지지 않기 위해 의지를 놓지 않는 일. 그것만이 우리 같이 사는 세상이어야 할 것이다. 머리로 판단하고 결론짓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사람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도저히 접지 못하는 마음’ 하나로 연결되는 세상이어야 할 것이다. 그 마음만 있다면 방주 같은 배나 미래 잠수함, 돔시티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필요하더라도 모두를 위한 배요 강이요 하늘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같은 마음의 세상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