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리뷰] 자신의 생각을 자신만의 속도로 말하기―눌변의 미덕(금정연)

눌변_입체

눌변: 소란한 세상에 어눌한 말 걸기』(김찬호 지음, 2016)

금정연(서평가, 『난폭한 독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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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나의 노력은 두 가지다.


1) 아무 말이나 하지 않으려는 노력
2) 아무 말이라도 하려는 노력

전자는 주로 일상생활에서 기울이는 노력이다. 간단히 말해, 내가 잘 모르거나 상대가 관심 없거나 들어서 기분 나쁠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는 것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떠들어서 무식을 들키고 싶지 않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상대를 지루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며, 상대가 언제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얼마를 벌고 평소 행실이 어떻고 머리랑 옷은 또 왜 그런지 별로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렇게 돈을 잘 벌고 똑똑하고 피부가 좋을 수 있는지도 궁금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문제는 후자다. 아무 말이라도 하려는 노력. 뛰어난 사람은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적절한 말을 하는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은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을 애당초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방금 내가 지어낸 말이다. 그 말이 맞다면(틀리다고 해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뛰어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나는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으로 제 발로 걸어가는 사람이고, 아무 말이라도 하기 위해 적지 않게 노력하는 사람이며, 아예 그것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지면에 글을 쓰고(주업)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부업) 게 나의 일이다. 직업을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고른 셈이다.

이것은 일종의 자가당착이다. 물론 변명은 있다. 나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라는 익숙한 문장으로 시작해서 20년째 오르지 않는 원고료와 늘 찾아오는 마감에 대한 푸념으로 끝나는 긴 이야기다. 그만두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 말이나 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아무 말이라도 하려는 모순적인 노력 사이의 거리다. 이를테면, 중간은 없는가? 자신의 무식을 자랑하거나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반대로 지면을 채워야 한다거나 먹고살아야 한다거나 마감 시한이 촉박하다는 핑계로 아무 말이나 늘어놓지 않으면서 해야 하는 말을 하기. 놀랍도록 소란스럽고 시시각각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신만의 속도로 말하기.

김찬호는 그것이 ‘눌변’이라고 말한다.

‘눌변’이라는 말이 있다. 더듬거리며 하는 서투른 말솜씨를 가리킨다. 여기서 ‘눌’은 한자로 ‘訥’이라고 쓰는데, 그 풀이를 찾아보면 ‘말을 더듬거리다’라는 뜻과 함께 ‘입이 무거워 말을 잘하지 않는다’라는 뜻도 있다. 그러고 보니 ‘언言’변에 ‘내內’자가 붙어 있는 글자다. 말을 안으로 담아둔다는 의미가 되겠다. 실제로 옛날에는 ‘눌변’이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낱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달변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처럼, 너무 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은 오히려 겉치레만 그럴듯하게 늘어놓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대상이 되었다. 서양에서도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처럼 말없음의 가치를 높게 사는 흐름이 있어 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쏟아내지 않고 생각으로 곱씹고 삭이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큰 말이 될 때가 많다. 마구잡이로 남발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눌변의 미덕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95~96쪽)

우리에게 눌변의 미덕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말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대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인간의 오래고 못된 버릇이지만, 역사상 지금처럼 말이 넘쳐났던 시기는 없다. 말이 많아질수록 말의 가치는 떨어진다. 말의 인플레이션이다. 그렇게 치면 나의 두 가지 노력도 전혀 모순은 아니다. 1) (어차피 말해봤자 소용도 의미도 없으니) 아무 말도 하지 말자. 2) (어차피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으니) 아무 말이나 하자.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2)다. 어쨌거나 나는 말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 말이 중요하다고 말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말의 가치를 높일 수 있을까. 김찬호는 “언어의 격조가 사라지는 것은 진지하게 귀 기울여주는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발언이 수용되지 못하리라는 불안에 사로잡히고 그 반작용으로 자극적인 언어를 남발한다. 그럴수록 서로에게 귀를 닫아버린다. 그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자기과시나 지배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상대방에게 온전히 향하는 마음을 불러와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하는데, 좋은 말이긴 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말의 주인은 그것을 내뱉은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제한하고, 그런 언어를 규정하는 것은 외적인 조건들(예를 들면 미디어)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었지만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맥락 속에 있는 것이다(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김찬호의 말이 지닌 의미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만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무엇이든 해야 한다. 이때 우리가 가진 것은 물론 말이다. 그때 그의 눌변은 일종의 ‘윤리적인’ 행위가 된다. 그는 말한다. “한편으로 이런저런 일들로 어안이 벙벙해지는 세상 앞에서, 다른 한편으로 정보의 폭주와 접속의 과잉 속에서, 글쓰기는 난감한 일이 되어간다. 무력해지는 언어로 생각을 빚고 대화를 청하기가 곤혹스럽다. 그래서 점점 눌변이 되어간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번잡하게 흘러가는 세태와 일상에서 이따금 한 발짝 물러나 문제를 진단하고 다른 가능성을 탐색해야 한다. 글쓰기는 그런 작업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한다.”

말하자면 『눌변』은 그런 책이다. ‘눌변’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눌변으로 쓰여진 생각. 말이, 그리고 말을 통해 유통되는 인간적인 가치가 바닥에 떨어진 세상에서, 곤혹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말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위엄 같은 것이 여기에 있다. 비단 말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별 수 없이 말을 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한 번쯤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을 김찬호는 썼다.

한 줄 요약 : 이 책을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내가 새삼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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